내 마음대로 할꺼야... => 내가 느끼고 생각한 대로 결정해서 할꺼야!! 라는 말이다.
그런데 마음이 이러저리 왔다갔다 한다.
그래서 이미 결정한 것에 대해서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이도 한다. 생각, 마음...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출처 : 마음은 ‘느낌’, ‘생각’, ‘뜻’으로 이루어진 것 (koya-culture.com)
[우리문화신문=김수업 명예교수] ‘마음’은 몸과 달리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만져지지도 않는 사람의 속살이다. 마음을 ‘사람의 속살’이라고 하는 말은 몸을 ‘사람의 껍데기’라고 하는 말과 짝을 이룬다. 우리 겨레는 사람을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의 속살인 마음은 세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 ‘느낌’과 ‘생각’과 ‘뜻’이 마음을 이루는 세 겹의 이름이다. 이들 세 낱말의 속뜻을 잘 살피면 마음의 속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느낌’은 움직씨 ‘느끼다’에서 끝바꿈하여 이름씨로 넘어온 낱말이다. 마음의 다른 속살인 ‘생각’과 ‘뜻’이 본디부터 이름씨 낱말인 것과는 아주 다르다. 느낌이 생각과 뜻과는 달리 움직임을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속살임을 알게 해 준다. 몸을 둘러싼 바깥세상이 쉬지 않고 움직이며 바뀌는 것에 따라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며 바뀌는 마음의 속살이 느낌인 까닭을 이런 말의 뿌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는 뜻이다.
‘느낌’은 춥고 덥고, 밝고 어둡고, 시끄럽고 고요하고, 쓰고 달고, 매캐하고 향기롭고…… 이런 것들이다. 이런 느낌은 모두 몸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 곧 자연과 사회에 살갗, 눈, 귀, 코, 혀와 같은 몸의 한 곳이 부딪치면서 일어난다. 몸이 세상에 부딪치면 살갗, 눈, 귀, 코, 혀들은 싫든 좋든 세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이들이 세상을 받아들이면 어쩔 수 없이 몸은 거기에 맞추어 얼마간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따뜻한 방 안을 나서 쌀쌀한 마당으로 내려서면 춥다는 ‘느낌’이 일어나기에 앞서 벌써 ‘몸’은 살갗에 소름이 끼치면서 부르르 떨리기까지 한다. 한여름 찬물에 보리밥을 말아서 된장에 풋고추를 찍어 먹을 때, 익은 고추를 씹으면 입에서 불이 나듯 맵다는 ‘느낌’이 일어나기에 앞서 ‘몸’은 입안 살갗이 붉어지고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다. 그렇게 달라지는 몸에서 빚어지는 마음의 움직임, 일테면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괴로움, 성남과 평화로움까지도 느낌으로 싸잡힌다.
‘느낌’은 이처럼 몸이 아닌 마음의 속살이지만 몸과 떨어질 수 없이 가깝다. 그래서 느낌은 몸에서 마음으로 들어가는 첫 마당이며, 마음에서는 가장 들머리에 자리 잡고 있는 첫 겹이다. 그만큼 느낌은 다스려지지 않은 채로 어수선하고 어지러운 마음의 가장자리다. 우리가 몸과 마음을 쉽게 나누어 이야기하지만 느낌이 마음이면서 몸과 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 몸과 마음도 동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다.
우리말의 깊고 그윽한 속내를 잘 모르던 시절, 한자와 한문에 얼까지 빼앗긴 사람들이 더러 ‘생각’을 한자말이라고 했던 적이 있었다. ‘날 생(生)’ 자와 ‘깨달을 각(覺)’ 자로 ‘생각(生覺)’이라고 어림없이 적어서 착한 사람들을 속였던 셈이다. 아직도 그런 시절에 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생각’을 한자말로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고 ‘생각’은 본디부터 우리 토박이말이었다.
‘생각’은 알고 모르고, 같고 다르고, 맞고 틀리고, 참되고 그르고, 옳고 외고, 이런 것을 가려내는 마음의 힘이다. 생각은 몸이 세상을 받아들여 느낌을 일으켰다가 천천히 가라앉힌 다음 마음 안쪽으로 끌어와 간추리고 갈무리하면서 빚어지는 마음의 둘째 겹이다. 세상에 부딪쳐 곧장 흔들리며 일어나는 느낌과 달리, 그런 흔들림이 가라앉은 다음에 빚어지는 마음의 움직임이기에 한결 서늘하고 고요하다. 그래서 알고 모르고, 같고 다르고, 맞고 틀리고, 참되고 그르고, 옳고 외고…… 이런 것을 가려내는 노릇을 감당해 내는 것이다.
몸이 세상에 부딪쳐 뭔가를 받아들일 적에 모든 것이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고, 느낌을 건드리지 않고 곧장 생각의 마당으로 들어서는 세상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 들어오는 세상은 몸을 흔들어 느낌을 일으키지 않고 곧바로 생각의 마당으로 들어서는 쪽이 많다. 느낌을 일으키며 들어오거나 느낌을 일으키지 않고 들어오거나 들어온 것은 마음의 속살을 새로운 짜임으로 바꾸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바뀜에서 가장 부지런히 움직이며 자라나는 마음의 속살이 다름 아닌 생각이다.
‘뜻’은 세상에서 받아들인 무엇이 ‘느낌’과 ‘생각’을 지나 좀 더 마음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자리 잡은 움직임이다. 뜻은 바깥세상을 받아들여 느낌과 생각을 지나며 간추리고 가라앉힌 마음의 셋째 겹 속살이다. 그만큼 뜻은 마음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어서 껍데기인 몸과는 더욱 멀어진 알맹이며, 몸의 알맹이일 뿐만 아니라 당연히 마음의 알맹이기도 하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 하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뜻은 생각을 끌고 가는 힘이기도 하다. 뜻이 생각을 끌고 가면 느낌도 끌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렇게 뜻이 마음을 끌고 가면 마침내 몸도 끌려가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뜻은 사람을 온통 끌고 가는 힘이며, 마음 안에서도 사람의 값어치를 가장 크게 높이고 낮추는 것이다. 이래서 뜻은 마음의 알맹이고 따라서 사람의 알맹이인 것이다.
그러니까 마음의 뼈대와 알맹이, 곧 마음의 노른자위는 한가운데 자리 잡은 ‘뜻’이다. 뜻은 생각을 이끌고, 느낌을 다스리고, 몸까지 사로잡을 수 있는 마음의 힘이다. 그래서 뜻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삶은 달라지게 마련이고, 뜻이 어떠한가에 따라 삶이 달라지면 사람의 값어치가 달라지게 마련이므로, 뜻이 사람의 값어치를 매김 하는 잣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뜻’이 온전하게 세워지려면 먼저 ‘생각’을 올바르게 다스릴 수 있어야 하고, 그보다 더 먼저 ‘느낌’을 제대로 가꾸어야 한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하겠다. 몸 바깥세상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살아 움직이는 느낌을 바탕에 깔고, 온갖 것을 가늠하고 간추리는 생각의 힘을 갖춘 위에, 굳세고 슬기로운 뜻의 힘을 세우면,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온전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이란 느낌과 생각과 뜻이 골고루 제 몫을 다할 수 있을 적에 마침내 바람직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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